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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인다/어쩌다 직업연구자

어쩌다 포닥시절

by walkingman 2022. 7. 18.

포닥이란 포스트 닥터 post doctor 의 줄임말로, 근래에 생긴 연구자의 직업 형태이다. 

역사를 추적해보긴 해야할텐데, 1990년대쯤부터 자주 포닥 관련 공고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들도 계신 것으로보아, 여튼 그 이전에는 굳이 이 직업군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박사 졸업자와 연구직의 수요와 공급이 어느 정도 적절히 균형을 맞춰왔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져서 공급>수요인 상태가 되고, 다수의 박사 졸업자가 정규 연구직을 원하는데 그 수요는 적다보니, 임시직의 형태로 박사 후 연구원인 포닥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나의 추정). 문제는 이런 박사후연구원의 고용 형태가 비정규직이고, 대체로 1년 혹은 2년, 혹은 6개월씩 계약을 갱신해야하며, 연구실 및 분야에 따라 임금 수준/가족들의 보험 커버 정도 등이 다 다르고, 그 외 복지 혜택을 받기 어려운 (미국의 경우) 경우가 많아 생계를 꾸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몇번의 불안정한 포닥을 마쳐야 정규직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사실 깊은 현실적 고민은 없이, 단순히 조금 더 연구해보고 싶다는 순진하기만한 생각으로 포닥을 지원했고 주변에 미국 포닥을 다녀오신 분들이 거의 안계셔서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포닥을 떠났다. 중간에 여러 일이 있었는데, 깜짝 놀랐던 몇가지만 정리하면 

  • 신랑이 같이 가려고 육아 휴직을 했는데 회사에서 감사패를 줬다 (응?) 
  • 미국에서 5시까지 보육을 맡기려고 알아보니 한달에 1000불 (한국돈 120만원 정도) 이 넘었다 (악?!) + 심지어 도시락은 내가 싸야했다. 
  • 가족 건강 보험은 커버가 안됐고, 기본으로 가입하려고 했더니 1인당 300불 (한국돈 36만원 정도) 정도 했던 것 같다. (아들 + 남편 2인을 매달 내려면..? 금액은 지금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다시 확인해서 수정해야겠지만 대략적으로 적었다) 
  • 포닥 월급에서도 세금은 떼고 나오고, 렌트비도 내야했다 (한달 렌트비로 1400불 정도 = 한국돈 170만원 정도). 물론 가스 전기 인터넷  + 관리비도 내야했다. 

살기 힘들었다. 저금은 꿈도 못꿨다. 얼마전에 월부 유튜브에 보니, S 대에서 박사과정 + 박사후 과정만 하던 부부분들이 결혼하시려나 현실의 상황을 보고 놀라 적으신 사연이 있으시던데, 정말 모을 돈은 없고, 주변에도 집구하기나 재테크 이런 것에 관심있어 알려주시는 분들도 없고, 논문은 원하는대로 잘 나오지 않고, 잘사는건가 싶은 의구심은 매순간 고개를 치켜드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우울했고, 감정적으로도 답답했는데, 영어로 대화를 주로 해야하다보니 마음을 나누기도 힘들었다. 한국 음식이라도 먹어 풀고 싶어 한국 치킨집에라도 갈라하면, 왕복 2시간은 기본이고, 팁까지주어 텅빈 계좌를 보면 도리어 더 슬픔의 지층이 증가하곤 했다. 우울과 슬픔, 자괴감과 후회가 켜켜히 층을 이루다 어느 누군가의 안정적 직업 찾기 성공 이야기를 들으면, 그 유구한 열등감의 지층이 갈라져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는 귀여웠고, 뭐라도 다 해주고 싶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수영에 구몬에 등등을 할 때, 집에서 한국에서 보내주신 OO 수학을 내 손으로 가르치며 괜찮다, 이게 더 좋은 것이다 하는 문장을 어금니로 갈아 씹어 삼켰던 것 같다. 진짜 더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못해주고 있다는 내 스스로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집은 오래된 학교 기숙사라, 환풍기로는 벌레가 수시로 나왔고, 말벌이 옷장에 몰래 집을 지어서 자려고 이불을 덮었던 신랑이 말벌에 쏘이기도 했다. 잘 때마다 이불을 요란하게 털어대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고, 잠결에 벌레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눈을 더 꽉감고, 이불로 온 몸을 돌돌 감쌌다. 불을 켜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이랬다. 물론 타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경험도 많았고, 좋은 사람들과 재미있는 주제로 연구한다는 기쁨도 컸다. 다만, 늘 연구하는 삶과 일반인의 삶 사이에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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