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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 문길주 "정부 간섭 싫다더니…연구자들 어느순간 스스로 길들여져"

walkingman 2020. 8. 16. 01:36

문길주 "정부 간섭 싫다더니…연구자들 어느순간 스스로 길들여져"

문길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총장

성장 멈춰버린 韓과학 위기
몸집 커지는데 작은 옷 입혀
시키는 일만 하는 도구 취급
R&D투자 1위, 성과는 부진

"정부 말 잘 들으면 편해져"
과학자들 수동적 환경 안주

뭐든 하도록 연구자율 보장
칸막이 예산도 확 풀어주면
10~20년후 노벨상 나올 것

  • 박봉권, 송경은 기자

◆ 신년 과학원로에게 듣는다 ◆

 대담 = 박봉권 과학기술부장

문길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총장이 지난달 매일경제신문과 대담하고 있다. 그는 "부모(정부)가 자식들(과학자)에게 넉넉한 옷(자율)을 줘야 한국에서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한주형 기자]

"한국 과학계의 연구 생산성이 낮은 것은 과학자들이 정부가 시키는 연구에 점점 더 길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0일 4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문길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총장(69)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세계 1위임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성과가 나오지 못하는 근본 원인을 이처럼 꼬집었다. 문 총장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를 넘어섰는데 정부 R&D 시스템은 3000달러 때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과학자들이 너무 오랜 기간 정부가 시키는 연구만 해왔고 이제는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우려했다. 그는 "한국 과학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정부는 더 이상 과학자들을 경제 발전 도구로 생각해선 안 된다"며 "연구소, 대학을 믿고 연구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50년 가까이 한평생을 과학기술계에 몸담아온 문 총장은 대기환경 과학자이자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다. 지난해 12월 인터뷰를 위해 무궁화가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매경미디어센터를 찾은 문 총장은 "무슨 색 넥타이를 맬까 고민하다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무궁화 넥타이를 매고 왔다"며 "오늘은 충정심 있는 얘기를 해야겠다"고 운을 뗐다.

―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 정책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가장 잘못한 것은 아이가 성장하는데 계속해서 작은 옷을 입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크다가 만다. 작은 옷을 버리기 아깝더라도 부모가 더 투자를 해서 성장시켜야 하는데 작은 옷을 입힌 채로 너무 오래 흘러온 것 같다. 사실 이번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제까지 줄곧 그래왔다. 한국 과학이 지금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 한국 10대 산업을 보면 다 과거에도 있었던 것들이다. 이전에 없었던 게 하나도 없다. 반면 미국, 중국을 보면 10대 산업에 들어가는 것 대부분은 이전에 없던 산업들이다. 학자들을 그저 정부가 시키는 일만 하는 `툴(도구)`로 보는 마인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오랫동안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으라는 강요를 당했는데도 왜 과학계는 그냥 따랐나.

▷사실 과학계 자체의 문제도 있다. 과학자들이 너무 쉽게 정부의 말을 듣고 따르는 데 익숙해졌다. 초창기에는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정부가 간섭하는게 불편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말을 잘 듣고 시키는 것만 하면 참 편한 거다. 지금 연구자·학자들이 이런 틀에 들어온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러면 도전정신이 사라진다. 미국의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같은 사람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사람이다. 기존 틀을 깨줘야 새로운 혁신이 가능하다.

―연구자 자율성을 보장하려면.

▷일단 넉넉한 옷을 사줘야 한다. 정부를 부모, 연구자를 비롯한 국민을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혹시 자식이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구자에게 연구의 자유를 넉넉하게 풀어줘야만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처할 수 있다. 실수를 통해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정부가 과감히 대학, 연구소를 믿고 풀어주면 좋겠다. 그게 첫 번째다.

또 지금 정부의 연구비 예산은 이 예산은 여기에만 써야 하고, 저 예산은 저기에만 써야 하는 식이다. 이런 걸 다 없애고 꼬리표를 붙이지 않은 뭉칫돈(lump sum)을 주고 `이것 갖고 자유롭게 알아서 해봐라` 하는 게 필요하다. 큰 테두리만 주고 나서 결과를 창출한 뒤 책임을 묻자는 거다. 한두 군데 정도는 1000억원을 주고 뭐든 해보라고 할 수 있어야 된다. 그렇게 10년, 20년 지나면 노벨상 수상자도 나올 거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지금 출연연은 국민이나 기업의 존경을 못 받고 정부로부터는 서자 취급을 받고 있다. 출연연에 돈을 1년에 2조원씩 주는데 뭐 했느냐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시스템이 바뀌지 않고는 현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

―출연연 연구과제중심제도(PBS)에 대한 불만이 크다.

▷어느 기업도 사람 뽑으면 월급은 꼬박꼬박 준다. 그런데 PBS는 기관마다 비율은 다르지만 월급을 50%가량만 준다. 나머지는 기관장이나 개인이 프로젝트를 수주해 충당해야 한다. 알아서 벌어먹으라고 하니 인건비를 벌기 위해 임팩트가 없는, 미래가 없는 단타성 연구를 할 수밖에 없다. 인건비를 100% 다 달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해이해질 수도 있다. 80% 정도로만 올리자는 얘기다. 출연연을 다 합쳐 2000억원 정도면 PBS 문제를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못하고 있다. 정부가 PBS를 깬다고 한 지가 언제인가.

―출연연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

▷최우선적으로 단기 성과 중심의 평가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기관장 평가부터가 단기적이다. 출연연 기관장 임기가 3년인데 3년만 잘하려고 한다. 야구에 비유하면 9회까지 가서 마지막에 점수가 뭔지 봐야 하는데 매 회차 점수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선수들이 아웃되든 말든 `나만 잘하면 된다`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내가 안타 치면 뭐하나. 뒤에 투아웃돼서 점수를 못 내는데. 출연연이 지금 그 꼴이다. 예산 칸막이를 없애고 25개에 달하는 과학기술 출연연 통폐합도 필요하다. 인력도 최소 지금의 2배로 늘려야 한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R&D를 독려하고 있다.

▷출연연 연구 인력은 그대로이고 이미 연구가 꽉 차 있는 상태지만 PBS 제도하에서 소·부·장에 예산이 집중되면 인건비를 벌기 위해 예산이 몰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만큼 나머지 다른 연구는 부실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열심히 밤새워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때쯤 돼서 일본 수출규제가 풀리면 기업은 다시 해외에서 더 저렴하게 사오는 길을 택할 것이다. 기업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이익이다. 누가 만들든 상관 안 한다. 싸고 좋으면 산다. 모든 걸 국산화할 수는 없다.

 과포자 없으려면…`과학자=富+명예` 인식 확산돼야

―수학·과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있다.

▷왜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지 봐야 한다. 수학·과학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의대 공부는 더 힘든데 포기하는 사람이 없다. 소녀시대 같은 아이돌 연습생도 어려워도 다들 하겠다고 달려든다. 인기가 있고 부가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한국에서 과학자가 된다고 해서 명성을 얻을 수 있나, 부가 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과학자들을 경제 발전의 `도구`로 여겨왔다. 그래서 존경과 명예가 안 따라왔다. 과학자 성공 케이스를 만들어 주면 학생들이 절대 수학·과학을 포기 안 할 것이다. 과학자를 많이 키우려면 먼저 과학자가 사회적으로 부러워할 만한 직업이 돼야 한다.

―국내 이공계 대학원생도 점차 줄고 있다.

▷해외에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은 없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만 많아지고 있다. 지금 젊은 세대 연구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자리가 대학교수다. 한국이 저성장 사회가 돼버리니 인공지능(AI) 등 특별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회사로 가는 걸 꺼린다. 어떻게 보면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대학으로 가는 거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여생을 편하게 살려고 석·박사 공부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일하기 좋은 터전을 곳곳에 만들어 주는 게 국가의 미션이다. 이제는 글로벌 시대다.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과학자들은 나중에 큰 물고기가 될 거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 중 일부는 대한민국에 크게 기여할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해외로 나간다는 사람 있으면 박수를 친다. 면접 볼 때 `여기에 뼈를 묻겠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한국 과학이 성과를 내려면.

▷선제적인 것을 해야 발전할 수 있다. 일례로 매사추세츠공과대(MIT)는 1985년 미디어랩을 만들었다. 교육 패러다임부터 바꾼 것이다. 한국은 올해 AI대학원을 만들었는데 기초과학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원만 만든다고 쉽게 역량을 쌓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노벨상은 0에서 1을 만들어야 주는 상이다. 없던 걸 만들어야 한다.

▶▶ 문길주 총장은…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오타와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기계·환경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2대 KIST 원장을 역임했다. 국제대기환경보전단체연합회(IUAPPA) 회장,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장 등을 지냈고 현재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제4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국무총리실 직속 미세먼지특별대책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리 =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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